제목에서 여성의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은 눈치챘지만 그 이상의 사전 정보는 없이 읽기 시작했다. 초반부터 김지영 씨의 영혼이 다른 사람으로 바뀌는 '사건'이 발생한다. 김지영 씨의 영혼이 남편 정대현 씨와 관계가 있었던 차승원 씨로 바뀌었을 때는 영혼이 휙휙 바뀌는 흥미로운 소설일 것이라 생각했지만, 추석에 시부모님 앞에서 장모님의 목소리로 이야기했을 때 이 책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깨달았다.
책의 전체 줄거리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여성인 82년생 김지영 씨가 사회로부터 받는 차별, 폭력을 이야기하고 있다. 김지영 씨는 태어날 때부터 사회로부터 목숨의 위협을 받았다. 만약 김지영 씨에게 언니가 한 명 더 있었다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여동생처럼 김지영 씨도 지워졌을 것이다. 학교에서는 '당연히' 남자아이들에게 앞 번호를, 여자아이들에게 뒤 번호를 배정했다. 바바리맨을 잡아다 경찰서에 넘겨도 학교 망신을 시킨다며 혼나야 했다. 심심치 않은 교사의 성추행도 견뎌야 했고, 학원 뒷자리 남학생이 스토커처럼 따라와도 '치마는 왜 그렇게 짧냐'라며 혼나야 했다. 스토커 남학생으로부터 김지영 씨를 구해준 것은 같은 버스에 탔던 여자인데 같은 시대를 살아온 선배로서의 따뜻한 위로가 기억에 남았다.
여자는 다행이라며 대뜸 학생 잘못이 아니에요, 했다. 세상에는 이상한 남자가 너무 많고, 자신도 많이 겪었다고, 이상한 그들이 문제지 학생은 잘못한 게 없다는 여자의 말을 듣는데 김지영 씨는 갑자기 눈물이 났다. 꺽꺽 울음을 삼키느라 아무 대답도 못하는 김지영 씨에게 전화기 너머의 여자가 덧붙였다.
"근데, 세상에는 좋은 남자가 더 많아요."
어느덧 김지영 씨는 대학에 갔다. 등산 동아리에서 첫 번째 남자 친구도 사귀었는데 1년 만에 헤어졌다. 그 후로 김지영 씨는 동아리 내에서 '씹다 버린 껌' 취급을 받아야 했다. 졸업반이 되어 면접을 보러 갔을 때는 '미팅을 나갔는데 거래처 상사가 신체 접촉을 하면 어떻게 하겠냐'라는 질문을 받아야 했고, 면접관의 눈치를 봐서 슬쩍 자리를 피한다고 어중간한 답변을 해야 했다. 회사에 입사해서는 자연스럽게 상사의 커피를 타 주고, 식당에 가면 자리마다 숟가락과 젓가락을 세팅했다. 근데 숟가락과 젓가락은 나도 세팅하는데 이런 것도 성차별로 느낄 수 있겠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리고 앞으로 내 커피는 타 주지 않아도 돼요. 식당에서 내 숟가락 챙겨 주지 말고, 내가 먹은 그릇도 치워 주지 말아요."
"부담스러우셨다면 죄송합니다."
"부담스러워서가 아니라 김지영 씨의 일이 아니라서 그래요. 그동안 신입 사원을 받을 때마다 느낀 건데, 여자 막내들은 누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귀찮고 자잘한 일들을 다 하더라고. 남자들은 안 그래요. 아무리 막내고 신입 사원이라도 시키지 않는 한 할 생각도 안 해. 근데 왜 여자들은 알아서 하는 사람이 되었을까."
결혼을 해서도 김지영 씨를 향한 사회의 차별은 계속되었다. 호주제가 폐지되었지만 어머니의 성을 따르는 경우는 아직 200건 안팎에 불과하다고 한다. 김지영 씨도 혼인 신고서에 스스로 어머니의 성을 따르지 않겠다고 표시했다. 임신을 해서도 자리를 양보받기 어려웠고 출산 이후에는 육아를 위해 일을 그만둬야 했다. 남편은 자상했지만 육아와 집안일을 항상 '도와'준다고 이야기했다. 오랜만에 아이를 데리고 나가서 커피를 마시고 있으면 '맘충' 소리를 듣는다. 이런 사회에서 김지영 씨가 자신의 영혼으로 온전하게 살아가는 것이 어쩌면 더 이상한 일이 아닐까.
내가 생각하기로 이 책에서 가장 특이한 점은 주석이다. 인문서나 과학, 자기계발 서적에서 출처를 밝히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허구를 기반으로 한 소설에서, 단어에 대한 설명이 아닌 내용의 출처를 밝히는 주석은 처음 본 것 같다. 아무리 현실 세계에 있을법한 내용이라고 해도 기본적으로 소설책이기 때문에 과장되었거나 허구라고 생각할 수 있는 장면에서 작가는 이 주석을 통해 독자를 현실 세계로 끌고 나온다. 어떤 면에서는 현실이 소설보다 더 암담했다.
책의 마지막에는 김지영 씨를 상담하는 의사가 1인칭 시점으로 등장한다. 본인 역시 의사 아내가 아이를 위해 일을 그만두는 모습을 보면서 대한민국에서 아이 있는 여자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공감하고 있다고 말을 한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상담사 이수연 선생이 마지막 인사를 하러 찾아왔다. 6년 만에 어렵게 아이를 가진 이수연 선생은 아이의 상태가 안정적이지 않다고 하자 일을 그만두기로 했다.
물론 이 선생은 훌륭한 직원이다. 얼굴은 고상하게 예쁘면서, 옷차림은 단정하게 귀엽고, 성격도 싹싹하고, 센스도 있다. 내가 좋아하는 커피 브랜드와 메뉴, 샷 수까지 기억했다가 사 오곤 했다. 직원들에게도, 환자들에게도 늘 웃는 얼굴로 인사하고 다정하게 말을 걸어 병원 분위기를 한결 밝게 만들어 주었다. 그런데 급하게 일을 그만두는 바람에 리퍼를 결정한 환자보다 상담을 종결한 환자가 더 많다. 병원 입장에서는 고객을 잃은 것이다. 아무리 괜찮은 사람이라도 육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여직원은 여러 가지로 곤란한 법이다. 후임은 미혼으로 알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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