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양자중력 이론의 관점에서 바라본 시간에 관한 이야기이다. 수학적 공식을 사용하지 않고 예시를 들어 잘 설명하고 있지만, 워낙 우리의 직관에 반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이해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특히 2부에서부터 가독성이 아주 떨어지는데 사실과 이론, 상상, 철학 등이 뒤섞여있기 때문이다. 다행인 것은 13장과 옮긴이의 글에서 전체 내용을 다시 정리해 주기 때문에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빠르게 읽고 넘어가면 될 것 같다.
유일함의 상실
시간은 산에서 더 빨리 흐르고 평지에서 더 느리게 흐른다. 나이가 같은 두 친구가 한 명은 평지에 살고 다른 한 명은 산에 산다면 수년이 지난 후 평지에서 산 친구는 살아온 시간이 짧아서 덜 늙어 있다. 이처럼 시간이 지연된다는 사실을, 누군가는 무려 한 세기 전에 깨달았는데 그 위대한 인물은 바로 아인슈타인이다. 아인슈타인은 태양과 지구가 서로 접촉을 하는 것도 아니고 중간에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중력으로 서로를 '끌어당기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 했다.
아인슈타인은 태양과 지구 사이에는 공간과 시간만 있으니 태양과 지구가 각자 주위의 공간과 시간을 변화시켜 서로를 향해 '떨어지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물체가 떨어지는 것도 이러한 시간의 지연 때문인데 아래쪽일수록 시간이 지구 때문에 느려지기 때문이다. 즉 시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공간 속의 모든 지점마다 다른 시간이 적용된다.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에 의해 시간은 유일함을 상실했다.
방향의 상실
시계들이 산과 평지에서 다른 속도로 간다지만, 어쨌든 시간은 모두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는 것 아닌가? 하지만 물리학에서 과거를 미래와 구분하는 일반 법칙은 루돌프 클라우지우스 교수가 발표한 '열은 차가운 물체에서 뜨거운 물체로 이동할 수 없다'는 법칙뿐이다. 시간과 열은 아주 깊은 관계에 있는데, 과거와 미래 사이에 차이가 나타날 때마다 열이 관여한다. 만일 거꾸로 진행한다면 터무니없어지는 모든 현상에는 열과 관련된 무엇인가가 있다.
클라우지우스는 '열이 역행 없이 한 방향으로만 이동하는 상황을 측정하는 양'에 대한 개념을 도입하고 '엔트로피'라는 명칭을 붙인다. 엔트로피는 측정 및 계산이 가능한 양으로 증가하거나 균일한 상태를 유지하기는 하지만 고립된 상황에서 '절대 감소하는 일은 없다'. 이를 '열역학 제2의 법칙'이라고 부른다. 루트비히 볼츠만은 한 발 더 나아가 과거와 미래의 차이는 무질서함에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렇다면 이 우주에서 우리 주위에 관찰되는 현상들은 왜 엔트로피가 낮은 상태에서 '시작'하는 걸까? 볼츠만은 우리가 세상을 희미하게 설명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한 묶음의 카드가 있는데 윗부분의 카드 26장이 모두 붉은색이거나, 윗부분의 카드 26장이 하트와 스페이드만 있는 구성은 모두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카드들의 색상만 보거나 모양만 봤을 때 특별한 것이고 모든 카드를 다 구별하면 구성은 동등해진다. 사물 역시 미시적인 상태를 관찰하면 과거와 현재의 차이가 사라진다. 시간은 방향성 또한 상실했다.
현재의 끝
여동생이 지구에서 약 4광년 떨어져 있는 프록시마b라는 행성에 갔다고 상상해보자. 여동생이 프록시마b에서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알 수 있을까? 내가 망원경으로 보거나 무선통신을 받는다면 내가 아는 건 여동생이 4년 전에 하던 일이지 지금 하는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동생이 하는 행동은 4년 후에 내가 망원경으로 보게 될 행동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것도 아니다. 그녀는 이미 지구에 돌아와 있을 수도 있다. 즉 프록시마b의 지금을 따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의 '현재'는 우주 전체에 적용되지 않는다. 현재는 우리와 가까이에 있는 거품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우주에는 같은 높이라는 통합된 개념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같은 순간이라고 규정된 시간이 없다. 우주의 시간 구조는 원뿔형으로 이루어져 있고 부분적인 순서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우주의 모든 사건과 그 사건들의 시간 관계를 단 하나의 보편적 기준으로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독립성의 상실
우리는 모두 상황에 따라 시간이 빠르게 흐르거나 느리게 흐르는 것을 경험한다. 그런데 왜 우리는 시간이 어느 곳에서든 같은 속도로 흐른다고 생각하게 된 것일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면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뉴턴은 사물이나 사물의 변화와 상관없이 '진짜' 시간은 흐른다고 생각했다. 뉴턴 이후 전 세계 교과서들은 시간을 공통적으로 생각하도록 기타의 개념들을 길러냈고, 우리는 이러한 교육을 바탕으로 시간에 대한 직관을 만들었다. 뉴턴의 시대가 오기 전까지, 인류에게 시간은 사물이 어떻게 변하는지 헤아리는 방식이었다.
시간뿐 아니라 공간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와 뉴턴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한 물체의 공간은 그 물체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반면 뉴턴은 절대적인 공간 그 자체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은 이 둘의 생각이 모두 옳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언제'와 '어디'가 항상 무언가와의 관계 속에서 정해진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의견은 옳았고,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움직이거나 변화하는 단순한 사물 외에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뉴턴의 예상 역시 옳았다.
시간의 양자
시간의 양자적 특성을 연구하는 학문을 '양자중력'이라 부르는데, 아직까지 과학 사회의 승인을 얻고 실험을 통해 확인된 양자중력 이론은 없다. 양자역학 덕분에 얻은 발견은 기본적으로 세 가지인데, 물리적 변수의 입자성과 미결정성, 관계적 양상이다. 이 개념을 시간에 도입해보자.
시계로 측정한 시간은 '양자화'된다. 즉 연속적이지 않고 여러 알갱이로 나뉜 것이라 생각하면 된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정확한 시계로 시간 간격을 측정한다면, 측정된 시간은 오직 몇몇의 분리된 특정한 값만을 취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시간의 '최소' 간격이 존재하는데 이 간격 이하로 내려가면, 가장 기본적인 의미에서 보더라도 시간으로서의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양자역학의 두 번째 발견은 불확정성이다. 내일 전자가 어디에서 나타날지 정확하게 예측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위치의 중첩이라고 한다. 시공간은 전자와 같은 물리적 물체기 때문에 파동처럼 흔들리며 다양한 형태로 '중첩'될 수 있다. 시공간이 중첩되면 한 입자가 공간에서 널리 퍼질 수 있듯이, 과거와 미래의 차이도 흔들릴 수 있다. 한 사건이 다른 사건의 전과 후 모두에서 발생할 수도 있다.
'요동'이 아무것도 결코 결정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고 단지 특정한 순간에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결정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미결정성은 하나의 양이 다른 양과 상호 작용할 때는 해소된다. 시간의 기간들은 무엇인가와 상호 작용할 때까지는 결정된 값을 가지지 않고 상호 작용이 있을 경우 상호 작용하는 그 무엇을 위해서만 입자화 되어 결정된 값을 지니게 된다. 즉 시간은 일관성 있는 하나의 캔버스가 아니라, 관계들의 느슨한 망이 된다.
특수성에서 나오는 것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것은 에너지다. 그런데 에너지는 창조되지 않고 파괴되지도 않고 보존된다. 에너지가 보존된다면 우리가 굳이 계속 더 만들 필요가 있을까? 같은 에너지를 계속 사용하면 되지 않을까? 그런데 세상을 움직이는 데 필요한 것은 에너지가 아니다. 필요한 것은 낮은 엔트로피다. 과거의 낮은 엔트로피는 이후 매우 중요한 결과로 이어졌다. 미래가 아닌 '과거의 흔적만' 있는 이유는 과거에 엔트로피가 낮았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전혀 없다. 과거와 미래의 차이를 만드는 근본적인 원인은 과거의 엔트로피가 낮았다는 것뿐이다.
'책 > 과학,수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기적 유전자 (The Selfish Gene) - 리처드 도킨스 (0) | 2022.05.18 |
---|---|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Why Fish Don't Exist) - 룰루 밀러 (0) | 2022.03.20 |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Survival of the Friendliest) - 브라이언 헤어, 버네사 우즈 (0) | 2022.02.02 |
심심할 때 우주 한 조각 - 콜린 스튜어트 (0) | 2021.01.06 |
나는 농담으로 과학을 말한다 - 오후 (0) | 2020.12.1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