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 오리지널 7번째 시리즈로 출간된 책이다. 밀리 오리지널이란 밀리의 서재에서 만든 종이책 정기구독 서비스인데 사용해 본 적은 없지만 의미 있는 시도인 것 같다. 뷰어 때문에 욕도 많이 먹지만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고마운 서비스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196페이지의 짧은 분량인데 구병모 작가의 글을 보면 '경장편'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긴 글을 읽지 못하는 세대'에 대한 우려의 시선도 있다고 하지만 분량을 채우기 위해 의미 없는 내용을 추가하는 것보다 좋다고 생각한다. 이 책 역시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느낌이다.
계절이 변하는 걸 절감할 때마다 나는 그 사람을 떠올렸다. 기어이 시멘트 틈으로 고개를 내민 민들레를 보았을 때, 후텁한 공기에서 물기가 맡아지거나, 인도에 떨어진 은행을 밟지 않기 위해 까치발로 걷다가, 창틀을 뒤흔드는 혹한의 바람 소리를 가만히 듣다가 문득문득 그 사람과 내가 헤어졌다는 사실을 깨닫곤 했다. 잊으려고 한 적이 없었으니 떠오르는 거야 당연했고, 그때마다 그 사람이 몹시 보고 싶다는 걸 굳이 외면하지도 않았다.
화자인 나는 마흔살의 여성이다. 6살 연하인 그 사람과 10년 전에 만나 몇 년을 만나고 몇 년을 헤어져 지냈다. 몇 년 만에 다시 만난 그 사람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고 나의 상황 역시 변하지 않았다. 그 사람은 예전과 같이 상자에서 반지를 꺼냈고, 이전과 달리 반지를 다시 상자에 넣지 않았다. 마음이 바뀌면 연락 달라며 그 사람은 떠났고 테이블 위에는 내 왼손 약지에 꼭 맞는 반지만 남아 있었다.
내가 사는 빌리의 입구에는 40년도 더 된 목련이 있다. 목련빌라에는 나와 부모님, 그리고 3년간의 결혼 생활을 끝내고 3년 전에 돌아온 여동생과 조카 2명까지 6명이 살고 있다. 3년간의 결혼 생활에서 동생이 얻은 건 원해서 낳은 아이 하나와 원치 않았던 아이 하나, 그리고 온몸에 남은 붉고 푸른 멍뿐이었다.
동생이 돌아온 후 집안일은 내 차지가 되었다. 나는 시를 쓰고 싶었지만 3년 전부터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쓸 것들은 오히려 많아졌지만 쓸 시간이 없었고 머릿속을 정리할 공간이 없었다. 동생은 나에게 아이를 맡긴 채 일을 하고 있고, 언제부턴가 연애도 하고 있다. 하지만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모든 상황은 급변한다. 엄마는 당분간 일을 쉬기로 했고 동생은 일을 줄이기로 했다. 동생이 집안일과 아이를 돌보기 시작하면서 나의 자리는 사라졌다.
인생은 길고, 넌 아직 피지 못한 꽃이다. 아버지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피지 못한 꽃, 아직 발화하지 못한 꽃, 아직 제대로 맺히지 못한 꽃. 내가 꽃이라면 한 번은 피워내고 싶었다. 더 늦기 전에, 정말 식구들에게 발목이 잡혀 땅에 묻히기 전에. 나는 쉴 곳이 필요했다. 나는 도망칠 곳이, 숨어 있을 곳이 필요했다. 적어도 식구들과 거리감을 둘 공간이 필요했다.
집을 나온 나는 그 사람의 방에서 지내다 곧 다시 시를 쓰기 위해 방을 구했다. 일도 구했고 일을 하지 않는 날에는 도서관에 가서 폐관 시간까지 마음껏 시를 읽었다. 집에는 보름마다 들렀는데 엄마는 여전히 나에게 노여움을 풀지 않았다. 그래도 집에 돌아갈 즈음엔 현관문 앞에 김치와 밑반찬을 담은 가방이 새침하게 놓여 있었다.
오늘은 그래서 그런 시를 쓰고 싶었다. 그 해의 열대야에 대해서, 깊고 오래된 골목길에 대해서, 그리고 그리운 사람의 그림자와 나의 눈물과 우리의 정류장과 모두의 무덤에 대해서. 서로의 체취로 속삭이던 노래와 지리멸렬한 계절에 속박되었던 오해와 피우지 못한 꽃과 기꺼운 약속과 작은 책상과 낡은 베갯잇과 차마 다하지 못한 희망과 나는 지금 여기 있다는 것에 대해서.
이 책을 단숨에 읽었던 것은 분량이 짧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소설 속 나와 상황은 달라도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우리의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루 중 언제 글을 쓰냐는 질문에 쓸 수 있을 때 그냥 쓴다는 구병모 작가의 말처럼, 소설 속 나의 상황은 현실을 닮아있다. 그녀가 시인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현실을 극복해 나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먹먹한 현실을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한 좋은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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