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률 작가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이소라의 음악도시라는 라디오 방송에서였다. 방송작가가 책을 낸 것이 신기해서 읽어 보았는데 한창 감성 돋던 나이인지라 재미있게 읽었던 것 같다. 나이가 들면서 감정 기복도 줄어들고 자연스럽게 에세이를 멀리하였는데 예전에 사 놓은 책을 정리하면서 펼쳐 보았다. 익숙한 사진들과 익숙한 구성, 여전하구나.
단풍이 말이다, 계속해서 남쪽으로 남쪽으로 물들어 가는 속도가 사람이 걷는 속도하고 똑같단다. 낮밤으로 사람이 걸어 도착하는 속도와 단풍이 남쪽으로 물들어 내려가는 속도가 일치한단다. 어떻고 어떤 계산법으로 헤아리는 수도 있다는데 도대체 이런 말은 누가 낳아가지고 이 가을, 집 바깥으로 나올 때마다 문득문득 나뭇가지를 올려보게 한단 말인가. 말과 말 사이에 호흡이 배어 있는 것 같은 이 말은, 이 근거는 누구의 가슴에서 시작됐을까.
예쁜 사진과 말들은 좋았지만 정말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을까 할 정도로 사소한 일에 수많은 생각들을 나열하고 있다. 의식의 흐름대로 글이 진행되다 보니 상황은 기억나지 않고 가독성이 떨어져 버렸다. 에세이니까 그러려니 하고 읽긴 하지만 조금 더 담백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그녀는 그곳에 다녀간 것일까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한 시각장애인 안마사가 있는데 이십 대 후반에 교통사고를 당해서 시력을 잃었다. 많이 사랑한 여자가 있었는데 사고를 당한 후 잠적해 버렸다. 그녀를 다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남자에게 작가는 그녀가 이미 다녀갔을 수도 있지 않겠냐는 말을 건넨다. 남자는 한 여자가 마사지를 받으며 우는가 싶더니 나가버린 적이 있는데 그녀인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고작 그녀의 손 몇 번 잡은 게 다여서 그녀를 만지고 있으면서도 그녀인 줄 몰랐었다면 얼마나 바보냐며. 마침 이 글을 읽고 있을 때 이어폰에서 잔나비의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가 흘러나왔다.
나는 사람의 인연이 눈으로 왔다가 눈으로 간다고 믿는 (민망할 정도로 낭만적인 사람이어서 결국은 사람 자체도 눈으로 빚어진 거라 믿는) 비과학적인 사람이다. 이런저런 일들을 겪은 후에 사람을 믿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도 동시에 철석같이 사람을 믿어(버려)서 스스로 눈처럼 녹(아 망해버리)는 형국을 자처한다. 여러 번이 아니라 실은 거의 매번 그렇다.
이병률 작가와 나는 같은 라디오 방송을 공유했지만 오랜 시간 다른 길을 걸어왔다. 나는 세상에 적응하며 지나치게 현실적인 사람이 되어 있었고, 작가는 아직도 어린아이 같은 감성을 가지고 있었다.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만 가끔 그때가 그립기도 하다. 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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