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넛지(nudge)'는 팔꿈치로 슬쩍 찌르다, 주의를 환기시키다란 뜻을 지니고 있으며, 여기에서는 타인의 선택을 유도하는 부드러운 개입을 뜻한다. 아마 넛지를 읽어보지 않은 사람도 소변기에 파리 모양의 스티커를 붙여놨더니 밖으로 새어나가는 소변량을 줄일 수 있었다는 예시는 익히 들어 봤을 것이다. 저자인 리처드 탈러에게 노벨 경제학상까지 안겨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넛지의 전면 개정판이 나왔다. 저자들은 파이널 에디션에서 초판의 50%를 완전히 새로 썼으며 코로나19 팬데믹이나 기후 변화 등 시대를 반영한 최신 사례를 추가하였다. 그런데 저자들이 파이널 에디션을 쓰게 된 행동에도 넛지가 작용했다. 미국과 영국의 출판 계약이 만료되어 새로 계약을 체결하게 되었는데 새로 만난 편집자가 원고를 수정하고 싶냐고 물어본 것이 계기가 된 것이다.
편향과 실수
책을 읽다 보면 '이콘'과 '인간'을 비교하여 설명하는 부분이 자주 등장한다. 이콘이랑 호모 이코노미쿠스, 즉 경제적 인간이라는 뜻이며 늘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선택하는 인간을 뜻한다. 하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다. 만약 슈퍼마켓에 가서 음식을 살 때마다 최상의 조합을 구성할 음식을 선택하려고 애쓴다면 아마 영원히 음식을 사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어림짐작을 사용하는데 거기에는 여러 가지 편향이 작용한다. 의사들은 '100명 가운데 10명이 사망한다'는 말을 들을 때보다 '100명 가운데 90명이 생존한다'는 말을 들을 때 해당 수술을 더 많이 추천한다. 즉 이콘이 아닌 인간은 넛지로 얼마든지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떼 지어 몰려다닌다
사람들은 대부분 다른 사람들에게서 무언가를 배운다. 다른 사람을 통한 학습이 개인과 사회를 발전시키기 때문에 이는 보통 좋은 현상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겪는 커다란 오해 가운데 많은 부분이 다른 사람들에게서 비롯된다.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틀린 답을 말했을 때 나도 틀린 답을 말하게 된다는 실험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사회적 영향 때문에 사람들이 잘못되거나 편향된 믿음을 가질 때 약간의 넛지가 도움을 줄 수 있다. 호텔 투숙객들이 수건을 다시 사용하도록 유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투숙객의 75%는 수건을 두 번 이상 사용함으로써 환경보호에 힘을 보탭니다'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다.
선택 설계의 세계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들이 많다. 탈러가 강의를 하던 강의실에는 커다란 손잡이가 달린 문이 있었는데 그 문은 바깥으로 열리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학생들은 손잡이가 보내는 신호를 무시하지 못하고 대부분 문을 당겼다. 밀어야 하는 문에는 '미시오'라는 문구를 붙여 놓은 평평한 판을 붙여 놓는 것이 더 좋은 설계이다.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하도록 장려하고 싶다면, 그 일을 쉽게 할 수 있도록 만들면 된다.
자동차에 사용하는 연료의 종류에 따라 연료 주입구 형태를 다르게 하면 다른 연료를 주입하는 실수를 막을 수 있다. 피임약은 3주 동안 날마다 먹고 그다음 일주일을 건너뛰어야 하기 때문에 날짜를 정확하게 외우기 어렵다. 피임약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8정짜리 특별 용기에 담아 판매하는데 22일 차부터 28일 차까지의 칸에 들어 있는 약은 아무런 약효가 없다. 그저 이콘이 아닌 인간이 약을 정해진 양만큼 정해진 날짜에 잘 먹도록 돕는 가짜 약일뿐이다.
스마트 공개
휴대폰을 사거나 요금제를 고를 때, 신용카드나 담보대출을 선택해야 할 때 어렵고 복잡한 의사 결정이 필요하다. 우리는 선택 설계의 한 측면을 개선함으로써 이런 의사결정의 과정을 개선할 수 있다. 그 측면은 정보를 수집하는 방식과 이 정보를 소비자가 활용하는 방식이다. 우리는 이것을 스마트 공개라 부른다.
시장 경제가 출발하는 데 필요한 것은 표준화된 측정 단위를 마련하는 것이다. 자동차의 연비 측정이나 대출 금리를 통일하는 것, 표준 계약서를 만드는 것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하지만 상품이 복잡해지면 작은 글자로 쓰인 부분까지 소비자가 이해하기 어렵다. 따라서 어떤 방식으로 공개할 것인지가 중요하고 저자들은 기계가 읽을 수 있는 방식을 강조한다.
예전에는 항공편과 호텔 예약을 해 주는 여행사 직원이 많이 있었지만 요즘은 누구나 여행 사이트에서 일정을 예약할 수 있다. 그리고 예전에는 항공사가 항공권을 구매할 때 소비자가 지불해야 할 세금 관련 정보를 공개하지 않아도 되었는데 의무적으로 공개하도록 규정이 바뀐 이후 항공사는 소비자에게 전가하던 세금 가운데 많은 부분을 포기해야 했다.
슬러지
넛지와 행동과학은 선과 악 어느 쪽으로도 사용될 수 있고, 또 그렇게 사용되어 왔다. 사람들이 원하는 바람직한 결과를 얻기 어렵게 만드는 선택 설계의 어두운 측면을 슬러지라고 한다. 재정 지원을 받기 위해 20쪽 분량의 서류 양식을 작성해야 한다면 슬러지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몇몇 선택 설계는 의도적으로 슬러지를 끼워 넣는데 회원 탈퇴나 구독 취소를 어렵게 만드는 것이 그런 예다.
또 다른 예시 중 하나는 메일 인 리베이트이다. 판매자가 제품을 판매한 후 가격의 일부를 돌려주는 것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캐시백이라는 용어로 쓰고 있는 것 같다. 기업들이 번거롭게 이런 방식을 택한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현금 상환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현금 상환을 받으라고 알려주는 것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유일하게 효과를 발휘한 방법은 '쉽게 만들어라'인데 마케팅 회사는 이를 반대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이 부분을 읽으며 유니세프가 떠올랐다. 네이버에 유니세프를 검색하면 연관 검색어 상단에 '유니세프 후원 취소'라는 검색어가 노출된다. 왜 사람들이 이걸 검색할까 궁금했는데 최근에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현재 유니세프에서 신규 후원자들에게 팔찌, 티셔츠 등을 주는 행사를 하고 있는데 그 중 티셔츠는 정기 후원을 해야만 받을 수 있다. 원래 정기 후원을 하고 있기에 기존 후원을 취소하고 새로 후원을 하려고 했더니 후원은 인터넷으로 간단하게 할 수 있지만 취소를 하려면 고객센터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한다. 완벽한 슬러지의 예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유니세프라 인정)
저축을 늘리는 넛지들
사람들이 연금을 많이 가입하도록 하려면 절차를 쉽게 해야 한다. 바로 가입을 기본 설정으로 정해두면 된다. 옵트인 방식의 제도에서는 입사 후 1년 이내에 가입하는 비율이 49퍼센트밖에 되지 않았지만, 옵트아웃 방식의 자동 가입 제도에서는 이 비율이 86퍼센트로 올랐다. 하지만 만약 잘못된 연금제도에 자동으로 가입하게 된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잘못된 결과가 돌아간다. 즉 기본 설정을 채택하는 비율이 높다는 것 자체만으로 성공이라고 할 수는 없다.
넛지는 영원히 계속될까
넛지의 효과는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 것일까. 선택 설계자가 마련한 특정한 설계는 일시적인 효과를 내는 데서 끝날 수도 있고 수십 년 동안 지속될 수도 있다. 저자가 스웨덴의 연금저축펀드의 사례를 분석한 결과 처음에 능동적이었던 사람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수동적으로 변하게 된다. 이들을 다시 깨우려면 주기적으로 다시 경고를 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이 경고에 익숙해지면 경고의 효과도 사라지기 때문에 경고를 여러 개 마련해 바꾸는 식으로 사용할 필요가 있다.
장기 기증 : 기본 설정 해법에 대한 환상
장기 기증 분야에 대한 내용은 넛지 초판에서도 장 하나를 할애해서 다루었다고 한다. 기본 설정을 '장기 기증을 한다'로, 즉 '추정 동의'로 정한 나라에서는 극소수 사람들만이 그 기본 설정을 변경해 장기 기증을 하지 않겠다고 선택했다. 그러나 기본 설정을 '장기 기증을 하지 않는다'로 정해 장기 기증을 약속하려면 능동적으로 특정 행동을 해야만 하는 '사전 동의'절차를 거쳐야 하는 나라에서는 대부분 장기 기증 대열에 동참하지 않았다.
따라서 저자들은 당연히 '추정 동의'를 지지하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유도된 선택'이라는 정책을 지지한다고 한다. 장기 기증 분야에서는 단순히 막대그래프의 막대를 최대한 높이는 제도를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한 목표가 아니기 때문이다. 가장 중심이 되는 목표는 한층 많은 장기가 이식될 수 있도록 해서 더 많은 생명을 구하는 것이긴 하지만, 이것과 대치될 수도 있는 관심사와 선호와 인권을 따지는 것도 중요하다.
추정 동의를 생각할 때 과연 명시적인 반대 의사를 표현하지 않은 사람의 선호도를 추정하는 것을 얼마나 강하게 원할지 고민해 봐야 한다. 특히 반대 의사 표현 비율이 상당히 낮을 때, 사람들이 자기에게 선택권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거나 반대 의사를 표시하는 과정에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한다. 그래서 기본 설정을 거부하지 않는 것이 언제나 명확하게 찬성한다는 신호가 아님을 감안한다면, 어떤 선택지를 기본 설정으로 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매우 신중해야 한다.
만약 어떤 나라가 엄격한 추정 동의 규칙을 채택하고 거의 모든 사람이 이 기본 설정을 따른다면, 상례적 적출(모든 권리를 정부가 가지는 것)과 추정 동의는 거의 동일한 정책이 될 것이다. 너무나 비슷한 두 정책 사이에서 하나는 어쩐지 괴기하고 다른 하나는 사려 깊고 현대적이라고 여겨지는 것은 어딘가 당혹스럽다.
저자들이 선호하는 방식은 '유도된 선택'인데, 자발적인 기증자가 등록 기증자가 되도록 유도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그들의 명시적 동의 수준을 높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단계는 등록을 쉽게 만드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인터넷으로 불과 몇 분 만에 장기 기증 희망자로 등록할 수 있다. 다음 단계는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이다. 현재 미국의 모든 주에서는 운전면허증을 갱신할 때 장기 기증자가 되겠느냐는 확인 질문을 받는다. 마지막 단계는 기증자의 바람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모든 주가 '당사자 동의법'을 통과시켰다. 개인이 기증자로 등록하면, 그 사람이 사망한 뒤 장기를 기증할 수 있도록 법률적 승인을 받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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