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시리즈의 세 번째 책이다. 하지만 모든 시리즈에 앞선 시대를 다루기 때문에 '제로'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책은 고대 이전, 위대한 스승들과 그들의 거대 사상을 다룬다. 위대한 스승들은 인류에게 올바름이 무엇인지 말해주었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 주었다. 자아와 세계가 실제로는 하나이며 근원에서 분리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고전을 다루고 있지만 채사장답게 쉽게 풀어서 이야기해 주기 때문에 편안하게 읽을 수 있다.
위대한 스승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는 '세계의 구조화'와 '판단 중지'가 필요하다. 세계의 구조화란 세계를 추상화해서 바라보는 과정을 말한다. 세계를 남자와 여자, 보수와 진보, 천국과 지옥으로 나눠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조금 더 근원적으로, 자아와 세계를 구분할 수 있다. 판단중지란 세계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선입견을 멈추는 태도를 말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선호하는 색안경의 브랜드가 있고, 태어나서 한 번도 그 색안경을 벗은 적이 없다. 진리에 도달하는 데 가장 중요한 조건은 용기다. 내가 쥐고 있는 세계관을 내려놓는 용기, 내가 믿는 진리가 거짓일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용기 말이다.
우주 : 세계의 탄생
'빛이 있으라' 그리고 기독교의 세계가 탄생했다. 빅뱅 이론이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종교적 세계관과 유사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스티븐 호킹 박사는 우주의 시간과 공간이 유한하지만 경계는 없을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빅뱅을 일으킨 것이 바로 신인 것이다. 그렇다면 과학계에서는 빅뱅 이전의 시기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까?
다중 우주론은 우리 우주가 유일하고 독립적인 하나의 우주인 유니버스(Universe)가 아니라, 다양한 가능성의 다수 우주인 멀티버스(Multiverse)로 존재한다는 우주관이다. 다중 우주에도 여러 가지 모형이 있는데, 텅 빈 시공간에서 양자 요동이 발생하고 수없이 생겨났다 사라지길 반복하던 반물질 중 물질 입자 몇 개가 살아남아서 빅뱅이 발생했다는 이론, 슈뢰딩거의 고양이 사고 실험에서 파생되어 관찰자의 의식이 세계에 영향을 미쳐 수많은 우주로 분화된다는 모형 등이 있다.
다중 우주론이 중요한 것은 미세 조정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이다. 우주 상수 값들은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세밀하게 조율되어 있어 마치 신이 개입한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수없이 많은 우주가 존재하고 저마다의 상수 값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신의 개입 없이도 설명이 가능하다. 즉 우주가 하필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우주 중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 우주에 생명이 탄생한 것이다. 그렇다면 관찰도 불가능하고 생명체도 탄생시키지 못한 우주를 과연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여기서 동서양의 거대 사상이 출발한다.
인류 : 인간과 문명
우리 우주는 138억 년 전의 대폭발과 함께 시작했다. 그리고 빅뱅 이후 92억 년이 지났을 무렵 지구가 탄생했다. 그리고 다시 12억 년이 지나고 모든 생물의 공통 조상인 루아(LUA, Last Universal Ancestor) 또는 루카(LUCA, Last Universal Common Ancestor)가 탄생했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600만 년 전 인류의 조상이 탄생했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인류 최초의 문명인 메소포타미아에서 기록된 영웅 서사시다. 지금으로부터 5천 년 전의 고전이지만, 인류는 비슷한 고민과 슬픔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신들은 진흙으로 인간을 창조했다. 하지만 인간들이 땅을 가득 채우고 소란스러워지자 홍수로 모든 것을 쓸어버리기로 한다. 하지만 덕이 많은 인간에게 이 계획을 알리고 그는 방주를 만들어 인간과 동물들을 실었다. 홍수 이후 살아남은 인간들은 다시 세상을 채워갔고 우룩은 거대 도시로 성장했다.
길가메시는 우룩의 왕의 아들로 어머니가 여신인 반인반신의 존재였다. 그가 우룩의 왕이 되어 악행을 일삼자, 백성들은 그의 악행을 멈춰줄 자를 보내달라고 간청했고, 야수 엔키두가 창조되었다. 길가메시와 엔키두는 결투를 벌였지만 승부가 나지 않았고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둘은 함께 모험을 했으나 엔키두가 병에 걸려 죽었고 길가메시는 죽음의 공포와 생명의 덧없음을 느낀다. 영생의 약초를 얻지만 뱀에게 빼앗기고 영원한 생명이 자신의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베다 : 우주와 자아
인류에게 가장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 문서는 두 가지다. 하나는 구약이고 다른 하나가 베다다. 구약은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의 뿌리가 된다. 베다는 우파니샤드, 힌두교, 불교의 뿌리가 된다. 한국인은 구약의 세계관에는 익숙하지만 베다는 낯설어한다. 서문에서 이야기한, 나의 세계 너머에 위치한 거대한 대륙인 것이다.
베다는 핵심 경전과 부속 경전으로 나눌 수 있다. 가장 오래되고 신들에 대한 찬가와 기도가 기록되어 있는 리그베다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철학서인 우파니샤드가 가장 중요한 경전이다. 아리아인은 자연, 신, 사제, 인간이 서로 물고 물리는 인과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복잡하게 연결된 세계를 정교하게 운영하기 위한 방법이 베다에 담겨있다.
우파니샤드는 베다의 핵심 사상을 철학적으로 체계화하여 정리한 책으로 세계와 자아의 관계를 탐구하고 있다. 우파니샤드의 핵심 사상은 범아일여인데, 우주 실체인 브라흐만과 자아 본질인 아트만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의미이다. 당시 인도 사회는 사제 계급인 브라만의 영향력이 큰 상태였는데, 자신의 내면에서 진리를 찾을 수 있다는 우파니샤드는 큰 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우파니샤드의 탈세속화가 문제가 되었고, 새로운 경전인 바가바드 기타가 등장하였다.
바가바드 기타는 산스크리트어로 '신의 노래'라는 뜻이다. 베다, 우파니샤드와 함께 힌두교의 3대 경전인 이 책은 베다의 세속적 측면과 우파니샤드의 탈속적 측면 사이에 균형을 가져다주었다. 결과에 집착하지 말고 주어진 의무를 성실히 행하면 마음의 평화와 자유를 얻고 신에게 다가가게 된다는 것이다.
도가 : 도리와 덕성
중국의 창조 신화인 삼황의 전설을 보면 세상의 탄생, 인류의 탄생, 대홍수 등 자연재해, 불 등 그 기원을 설명하는 방식이 구약의 창세기, 길가메시 서사시, 혹은 그리스 신화와 유사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4대 문명 중 황화 문명은 나머지 세 문명과 교류가 거의 없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므로, 신화가 실제의 사실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거나 인간의 사유 방식이 구조적으로 유사하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노자의 생몰연대는 분명하지 않은데 대략 춘추시대 초나라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젊은 시절 주나라의 천자를 섬겼지만 춘추시대 말기 주나라가 급격히 쇠퇴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은둔의 삶을 살았다. 노자가 관직에서 물러나 성문을 빠져나갈 때 수문장 윤회는 한 말씀만 남겨달라고 부탁했고, 노자가 앉은 자리에서 오쳔여 자의 글을 써준 것이 도덕경이다. 도란 우주의 법칙과 질서, 덕이란 그러한 도의 본질이 반영된 인간의 마음이다. 즉 내면에서 우주를 발견할 것을 제안했고, 그런 면에서 범아일여의 가르침과 같은 선상에 있다.
노자가 혼란한 세상을 떠나 초월적 가치로 나아가고자 했다면, 공자는 인위적 개입을 통해 세상을 바꾸려는 현세적 가치를 추구했다. 논어는 공자와 그의 제자들의 언행을 기록한 책으로 핵심 사상은 인이다. 공자의 인은 공손함, 관대함, 신실함, 자애, 지혜로움, 용기, 정직, 효성, 인간적임, 인정이 많음, 친절함 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는데 종합해본다면 인간이 취해야 할 궁극의 지향점이자 심오한 인간중심사상이라 할 수 있다. 인을 실천하는 방법이 예인데, 공자는 예가 아닌 것은 보지 말고 듣지 말고 말하지 말고 행동하지 말라고 했다.
불교 : 자아의 실체
고타마 싯다르타는 기원전 6세기에 네팔 지역의 카필라 왕국의 왕자로 태어났다. 성자 아시타가 싯다르타를 보고 출가하면 붓다가 될 것이라고 말하자, 왕은 성문을 걸어 잠그고 세상을 보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싯다르타가 청년이 되었을 때 세상에 관심을 갖게 되고 결국 29세에 깨달음을 얻기 위해 출가한다. 35세가 되던 해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마침내 깨달음을 얻고 깨달은 자, 붓다가 되었다.
불교의 근본 교리는 사성제와 팔정도다. 사성제는 고, 집, 멸, 도의 네 가지 진리를 말한다. 고성제는 고통으로 가득 차 있는 세계를 직시하는 것, 집성제는 고의 원인인 집착을 의미한다. 멸성제는 모든 고통과 괴로움이 사라진 깨달음의 상태로 고통의 원인인 집착을 풀어헤쳐 해탈에 이르는 길을 제시한다. 열반과 해탈에 이르기 위한 수행 방법이 네 번째 진리인 도성제이고, 여덟 가지의 방법이 있어 이를 팔정도라고 부른다.
불교가 바라보는 자아의 실체는 오온이다. 이는 나란 색, 수, 상, 행, 식 다섯 가지 요소가 임시로 쌓여있는 무더기일 뿐이라는 것이다. 불교가 바라보는 세계의 실체는 연기이다. 이는 모든 현상이 원인과 조건에 의해 생겨나고 사라짐을 가리킨다. 이에 따르면 세상 모든 것 중에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고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다른 것들과 얽히고설킨 인과의 톱니바퀴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이다. 자아 역시 연기의 조건 위에서 잠시 발생한 것일 뿐이다.
철학 : 분열된 세계
서양 철학을 대표하는 인물은 소크라테스다. 그는 진리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내면에 잠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들의 대답 속에서 모순점을 찾아 다시 질문하는 방법을 반복함으로써 사람들을 막다른 길로 몰아넣었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이 스스로의 무지를 깨닫고 그 지점에서 진정한 의미의 철학을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랐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의 스승의 죽음을 보고 정치적 야망을 꺾었다. 그는 이성을 중시했고, 민주제를 불신하고 소수의 훈련된 엘리트가 지배하는 사회 체제를 꿈꿨는데 이를 철인정치라 불렀다. 철인정치는 현대 사회에 이르러 그 한계와 문제점을 신랄하게 비판받았지만, 플라톤의 사상이 2천 년 넘게 서구 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다. 수학자이자 철학자였던 화이트헤드는 '서양의 2천 년의 철학은 모두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라고 말했다.
플라톤 사상의 중심 개념은 '이데아 세계가 실재한다'라는 것이다. 이데아 세계란 절대적이고 완벽한 불변의 이상 세계를 말한다. 플라톤에 따르면 이데아 세계가 진짜 세계이고, 현실 세계는 단지 이데아 세계의 그림자일 뿐이다. 그 유명한 동굴의 비유가 여기에서 등장한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이후 서양 사상의 토대가 되었고, 서양인의 세계는 영원한 진리의 세계와 현실 세계로 나뉘었다.
외부 세계를 내부 세계의 반영으로 생각하는 입장은 18세기 칸트에 이르러서야 진지하고 심도 있게 탐구되었다. 그의 대표작 '순수이성비판'은 철학사에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가져왔다. 순수 이성은 인간이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인식의 능력을 말한다. 순수 이성은 감성, 지성, 이성의 세 가지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이를 우리의 유일한 도구인 이성을 통해 점검하고 한계를 명료히 하는 작업이 순수이성비판이다. 즉, 인식 대상을 문제 삼기 전에, 인식 주체의 인식 능력을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칸트 이후 서양 철학은 이원론에서 일원론으로, 실재론에서 관념론으로 이동하게 된다. 눈앞의 세계는 실체가 아니라 나의 의식 능력이 만들어낸 내 의식 안의 세계다. 나의 세계는 내가 눈뜬 것과 동시에 생성되어 내가 눈 감는 동시에 소멸한다.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원리는 관찰자로서의 의식적 존재를 고려하게 한다. 양자 얽힘은 사물과 사물, 사물과 의식이 더 높은 차원에서 연결되어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게 한다.
기독교 : 교리와 신비
서양 사상의 두 토대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다. 헬레니즘은 그리스, 로마의 정신을, 헤브라이즘은 구약 성서의 세계관을 말한다. 헬레니즘은 서양 철학의 기원이 되었고, 헤브라이즘은 기독교의 기원이 되었다. 두 사상은 근원에서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데 그것은 바로 이원론이다. 플라톤 이후 서양 철학이 세계를 이데아와 현실로 나누고 세계와 자아를 양분해온 것처럼, 기독교는 세계를 천국과 지상으로 나누고 신과 인간을 양분해왔다.
예수는 이스라엘 왕국 다윗 왕의 혈통으로 기원전 7년에서 기원전 4년 사이에 태어났다. 때가 되어 출가한 예수는 가난한 자들을 제자로 삼고 가르침을 전했다. 예수의 가르침은 오늘날 일반적으로 알려진 기독교의 교리와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는데, 대표적으로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가 현실과 분리된 죽음 이후의 사후 세계가 아니라 지금 여기의 현실 세계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단순히 착하게 살면 사후에 복을 받는다는 기복적인 믿음이 아니라 나의 삶과 현실을 개선하고자 하는 실천적이고 혁명적인 측면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지위에 대한 해석은 온전히 바울에 의해 이루어졌다. 바울은 예수의 생전 가르침보다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하느님의 구원의 역사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예수가 어떤 지위를 갖는지에 집중했다. 구체적 현실의 예수가 바울로 인해 초월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예수로 변모한 것이다. 바울은 유대교의 작은 종파로 여겨지던 기독교를 세계적인 종교로 성장하게 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에필로그
동양의 철학적 사유가 일원론으로 시작된 반면, 서양의 철학적 사유는 이원론으로 시작되어 근대 이후에 이르러서야 일원론을 발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근현대의 역사가 서양의 승리로 끝나면서 동양의 근현대는 서양을 배우고 모방하는 역사가 되었고, 위대한 스승들의 거대 사상은 이미 우리에게서 잊혔다. 일원론의 세계에서는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을 보고, 세계가 자기 내면의 반영임을 매 순간 느끼며 성장할 수 있다. 원래 우리가 주인이었던 잃어버린 절반의 세계인 일원론의 세계로 발을 내디뎌 보자. 그 깊은 곳에 출구가 있고, 그 출구는 우주와 연결되어 있으니. 이것이 바로 이 책에서 채사장이 하려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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